https://youtu.be/OfRBEkiYIh0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절망이 곧 죽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대의 교회는 비판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절망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데에서 오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기독교적 부활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물리적 죽음 이전에 이미 심리적 죽음이 먼저 도래하고, 그 심리적 죽음은 바로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사형수를 상대로 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손을 뒤로 묶인 채 몇 대의 단두대 중 한 대에 머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계속 사형이 집행되던 단두대였기 때문에, 그 사형수의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형수도 절망 상태에서 모든 것을 체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단두대가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뒤이어 사형수의 뒷목에서부터 주루룩 무언가가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사형수는 죽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형수의 단두대는 작동하지 않았고, 옆에 있는 다른 단두대가 작동한 것이었습니다. 사형수 목줄기로 흐르던 것도 사형수의 피가 아닌 사형 집행인이 흘려보낸 차가운 얼음물이었습니다. 즉, 사형수는 물리적으로 죽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절망한 사형수는 심리적 죽음과 함께 스스로 물리적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통도사의 유명한 스님이었던 경봉선사는 힘들어하는 신도들에게 종종 다음과 같은 문구를 써 줬다고 합니다. 그것은 ‘山盡水窮疑無路(산진수궁의무로) 柳綠花紅又一村(유록화홍우일촌)’입니다. 이 문구의 내용은 ‘산이 막고 물길이 끊어져 더 이상 길이 없다고 여기고 낙담했지만, 끝까지 가 보니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붉은 꽃이 핀 마을이 나타났다.’라는 것입니다. 결국 심리적으로 끝이라고 느끼는 것은, 어쩌면 진정한 끝이 아닌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의 끝은 사람의 인식 범위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범 김구는 일본의 육군 중위인 스치다를 죽이고,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사형 집행일을 알고도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냅니다. 그런데 고종 황제가 급하게 시외 전화를 하고 극적으로 사형을 면하게 됩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최근의 재미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때, 호주의 브래드 버리 선수가 있었습니다. 나름 실력이 있었던 선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훈련도중 목뼈 골절 부상을 입고 선수 생활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퇴하지 않고 재활 치료를 하여 다시 올림픽에 출전합니다. 메달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만든 스케이트를 홍보하고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선에서부터 계속 운이 따르고, 결국은 결승전에서 우승하면서 금메달을 거머쥐게 됩니다. 그 당시 함께 했던 선수는 한국의 김동성과 안현수, 중국의 리자준, 미국의 안톤 오노라는 세계적 선수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고, 끝까지 가 보려는 마음을 품으면 자연스럽게 운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가 지은 ‘이타카’라는 유명한 시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희망하기에 절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희망의 끝이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구체적이고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희망은 영생을 향하여 뻗어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타카’라는 시의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현자가 되었으니’ 라는 구절처럼, 우리는 과정을 살아갈 뿐이고, 그 과정에 충실함으로써 얻어지는 다양한 경험의 풍요로움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모로 어우선하고 두려운 시기입니다. 그런데 물리적 바이러스의 전염보다 심리적 바이러스인 두려움의 전염이 더 문제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많은 권력과 권한은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것은 절망이 도래하기 이전의 심리 상태입니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절망이라는 마지막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절박한 불안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열망이 생기고, 그 열망을 하나의 힘으로 모으려는 다양한 세력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지금 이상의 혼돈은 주기적으로 있었습니다.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나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나, 우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에 매몰되었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세력에게 힘을 몰아주었으며, 그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혼돈과 두려움의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주명리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주명리학도 어떤 끝을 염두해 두지 않습니다. 그냥 자신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오늘의 균형 잡기 위한 행동에 최선을 다 하다 보면, 그에 맞는 미래가 도래하고, 우리는 겸허히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주에서 미래를 보는 것도, 오늘의 균형잡기 위한 방법을 가늠하려는 것이지, 미래를 단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주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습니다. 더불어 어떤 가치 기준도 없습니다. 마치 자연처럼 그냥 존재할 뿐이고, 사람은 그것을 관찰하고 관조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주를 통해 두려움을 느끼거나 희망을 보는 것은, 관찰자의 주관입니다. 그리고 그 관찰자의 주관적 의도에 따라서 힘과 권위를 갖고, 사람들을 제어하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과하게 두려움을 심어주거나, 너무 과하게 희망적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사주명리학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누구도 미래의 두려움과 절망을 기대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하나의 동일한 현상에 대해서 이왕이면 긍정적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관점이라는 것은, 물이 반절 밖에 안 남았다고 보거나 물이 반절이나 남았다고 보는 것처럼 상대적일 뿐이지만, 희망과 긍정의 관점을 견지하면, 적어도 두려움과 절망으로 이어져서 심리적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관점을 견지하면, 심리적 죽음을 넘어 물리적 죽음을 맞이하는 끝까지 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죽음을 맞이하는 끝까지 가려고 버티다 보면, 김구나 브래드 버리와 같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우연의 축복도 올 수 있고, 경봉 선사가 말한 뜬금없는 무릉도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미리 예측하거나 단언하려 하거나, 비이성적인 두려움의 선동에 휩쓸리기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희망을 가지고 최대한 버티는 것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최선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규칙적이고 정해진 흐름을 깨는 것은 변칙적인 것이지만, 또 변칙적인 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은 규칙적인 체계와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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