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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질서를 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질서가 어느 정도 잡히면 정체됨을 느끼고 답답해 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미 강하게 잡힌 질서는 작은 충격에는 크게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한 충격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무질서를 불러오게 됩니다. 그래서 질서는 어떤 완성이 아니라 무질서의 반대일 뿐입니다. 오히려 질서와 무질서의 아슬아슬한 중간 상태, 균형의 상태가 완성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완성의 상태는 이상일 뿐입니다. 마치 시소타기처럼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기울어가는 중에 거쳐 가는 순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삶도 그렇고 세상도 그렇고 균형과 완성의 중간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시소타기를 하는 과정만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존중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배는 산으로 가게 됩니다. 계속해서 배가 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머물러 있기만 하면 사람들은 또 혐오와 지루함,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강한 비전을 제시하고 자신들을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어줄 힘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집중된 강력한 힘도 있고, 많은 사람들 개개의 목소리도 소중하게 존중되며, 정체되지 않고 무언가 일관된 방향으로 발전해 간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잠시나마 중간 중간 특정 국가에서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적인 사람이나 사회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공격을 받게 되고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새하얀 수건을 계속 그 상태로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고, 그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합니다. ‘행복만 있는 곳에는 행복이 없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불행을 알기 때문에 행복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상이라는 것도 답답한 현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기는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을까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역적 국지전은 있었지만 나름 질서의 시대를 유지해 왔습니다. 각 개인의 권리뿐만 아니라 소수 국가의 권리도 커졌습니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변되던 냉전의 시대도 끝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유럽연합과 중국도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각자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해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후협약과 같은 국제적 사안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찾지 못하고 논쟁만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국제적 사안의 문제뿐만 아니라 각국의 내부로 들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법안이 계류 상태에 있고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일방적인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이는 좋게 말하면 견제의 힘이 커졌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지루한 공방전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기존의 권력들이 취약한 곳부터 무너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역반응으로 더 강력하게 권력을 장악해 가려는 트럼프나 시진핑, 푸틴 등도 있지만 아슬아슬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권력을 더 강하게 잡으려는 권력자들의 세력 다툼 때문에 오히려 더 급격하게 기존의 권력이 무너지고 그 사이를 비집고 어부지리를 얻는 새로운 권력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재적 권력자들의 세력 다툼에 의한 혼란이든, 권력의 분산에 따른 혼란이든 결국 사람들은 다시금 새로운 질서를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질서와 권력에 대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의 새로운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지지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작금의 권력 쇠퇴에 대해서 잘 언급한 책은 모이제스 나임의 󰡔권력의 종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권력의 쇠퇴가 여러 학자들이 말하는 인터넷을 통한 급격한 정보 확산 이전부터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말하는 권력 쇠퇴의 원인은 인구 증가에 따른 양적증가혁명, 이동의 자유 확장에 따른 이동 혁명, 지식의 보편화와 대중화에 따른 의식 혁명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혁명의 씨앗에 인터넷의 보급이 기름을 부으면서 권력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과거의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이 세 가지 혁명의 씨앗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인구 감축, 이동의 자유 제한, 지식의 확장 저지가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세 가지 혁명의 씨앗을 제거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 사태를 보고 있자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 가지 혁명의 씨앗이 현실에서도 제거되거나 조절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면서 새로운 권력의 태동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식의 확장을 저지하기는 힘들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의 확장에 따른 정보의 범람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선택지를 주면서 오히려 정보가 없는 상황과 동일해 졌기에, 충분히 지식의 확장이 저지될 수 있고, 나아가 지식과 정보의 왜곡된 일원화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자도 권력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언급하면서 이미 그 속에 어느 정도 새로운 권력이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언급한 권력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중에 발생하는 문제는, 무질서, 탈숙련화와 지식의 상실, 사회운동의 진부화, 인내심 부족과 주의력 분산, 소외라는 다섯 가지입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독일 국민이 왜 전폭적으로 나치를 지지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독일인들이 우매한 것도 아니고 무조건 집단주의 성향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런데 데니스 간젤 감독의 <디 벨레>라는 영화를 보면 특정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든 독재적 권력과 집단주의를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원하면서도, 너무 개인화가 진행되면 다시금 외로움 때문에 집단의 흐름에 편승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이제스 나임이 말한 권력의 종말 현상을 한 국가에 국한하여 잘 보여준 영화로는 개빈 후드 감독의 <아이 인 더 스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현대의 전투 중에 권력자들 서로가 책임을 미루면서 중요한 타이밍을 놓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그 내용은 드론을 통해 추적한 테러범을 공중 폭격하여 지금 죽이면 그 주변의 무고한 일부 사람도 죽을 수 있지만 테러에 의한 더 큰 희생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테러범을 죽이기 위해 일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뒤에 발생할 정치적 책임과 문제들로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인지합니다. 그래서 서로 최종 결정을 미루게 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가장 이상적이라는 민주주의도 특정 상황에서는 위태로울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동일한 민주주의 국가를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 사회민주주의 국가 등이 최종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들의 행동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상황이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태동하는 권력은 기존의 부패와 부정, 그리고 각종 단점들을 일소하게 정의롭게 시작할까요? 이에 대한 미래의 흐름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절대적 정의나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보편적 정의는 없기 때문에 정의로운 권력의 태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정의롭게 시작한 권력이든 부정하게 시작한 권력이든 결과에서는 모두 타락하게 마련입니다. 진보는 보수를 깨고 태동하지만 그 진보 또한 어느 시점에서는 보수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기존의 권력을 깨고 등장한 진보의 세력도 권력을 잡은 뒤에는 또 다른 새로운 권력을 저지하려 합니다. 이 세상은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기에 진보가 또 다른 보수가 되어도 그들 스스로는 여전히 진보라고 생각을 하고 새롭게 태동하는 또 다른 세력을 새로운 진보가 아닌 적이나 부정한 세력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민중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야심차게 시작한 많은 권력들이 정적을 제거한 뒤에는 독재화 되거나 기존 권력 이상으로 부패해 가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또한 한 번 획득한 기득권은 계속 그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뿌리를 내립니다. 아무리 정의롭고 객관적이며 상식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도 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는 팔이 안으로 굽고 감정적이 됩니다.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전승하고 싶은 뿌리 깊은 본능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거부하고 역행하는 사람이 특별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강하게 뿌리내린 기득권은 역시나 큰 충격이 아니라면 깨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득권이 깨지기 위한 큰 충격과 혼란은 새로운 권력을 태동시키기도 하지만 기득권에 속하지 못한 개개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향후의 권력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미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 깨닫고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고 소통하고, 때로는 모여서 한 목소리를 내는 등의 아날로그적 관계 맺기는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 대신에 디지털을 근간으로 한 비대면 관계가 확장되고 대규모의 정보 전달은 플랫폼을 확보한 특정 세력이 주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각 개인은 많은 정보를 주도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확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편집되고 왜곡된 정보에 현혹될 수도 있습니다. 즉, 주도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큰 틀에서는 계획과 통제 속에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피아노 건반으로 무한히 새로운 연주를 할 수 있지만 또 피아노 건반의 개수는 정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우리 힘없는 한 개인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내일의 예측할 수 없는 혼돈의 두려움에 매몰되거나 막연한 미래를 어떻게든 알아내 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기 이전에 오늘 명확하게 주어진 하루를 깨어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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